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라노 키요모리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이세(伊勢) [[타이라]] 가문의 두령인 타이라노 타다모리의 적장자로 태어났다.[* [[스토쿠 덴노]]처럼 [[시라카와 덴노|시라카와 법황]]이 진짜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. 그래서인지 밑에 나오는 [[NHK]]의 [[사극]] [[타이라노 키요모리(드라마)|타이라노 키요모리]] 1화의 제목이 "두 사람의 아버지"이다. 그런데 이렇게 되면 [[호겐의 난]]에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한 [[스토쿠 덴노]]는 더 굴욕이다.] '''간무 헤이시(桓武平氏)''' 가문은 [[간무 덴노]]의 방계 후손들이다. 그의 집안은 그 중에서도 '''이세 헤이시(伊勢平氏)'''로 현재 [[미에 현]] 일대에 장원을 가진 대대로 무장 가문이었다. 당시 일본의 무장 가문들은 마치 우리의 [[고려]] 전반기처럼 귀족들에게 무시를 당했으며, 조정에서도 좀처럼 하위 품계를 벗어나지 못했다. 당시 일본 조정은 천황과 그 측근들인 후지와라 씨들이 파벌들을 이뤄 내부 경쟁을 할 뿐이었다. 그런데 마침내 무장들에게도 기회가 왔다. 소위 인세이(원정,상황 정치)라는 전임 천황이 상황으로 물러나 권력을 휘두르는 비정상적인 권력 구조의 모순이 심화되는 상황에 무장들이 권력자들의 아귀 다툼에 이용되면서 권력의 핵심에 좀 더 가까와졌다. 중세 일본은 장원 제도가 있어 귀족과 그 측근들이 땅(장원)을 내려받았는데, 점점 권력을 가진 무장 집안들이 높아진 공훈을 바탕으로 지방 근거지에서 힘을 길렀다.[* 커진 실력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켰었던 [[타이라노 마사카도]]도 이 가문 출신이었고, 키요모리의 아내였던 타이라노 토키코 역시 간무 헤이시 계열의 정5위 급 무장 집안 출신이었다.] [[타이라노 마사카도]]의 난 이후 타이라 씨 일족 중 [[이세]] 지방에 자리잡고 실력을 기른 가문이 '이세 헤이시'이다. 어린 시절부터 [[시라카와 천황|시라카와 인]]의 측실 기온노 뇨고가 양모처럼 그를 돌보았다고 한다.[* 설이긴 하지만 타다모리의 아내가 기온뇨 뇨고와 친자매라고 알려져 있다. 더 극단적인 설로는 키요모리가 시라카와 인의 씨다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.] 시라카와 천황이 무려 43년 간 꼭두각시 천황들을 부리고 정치를 할 때 타이라노 타다모리와 그의 일족은 제일 앞에 섰다. 그 결과 키요모리가 성인식을 올리던 불과 12세 때 종5위하 사효에노스케(従五位下左兵衛佐)직에 제수됐다. [[1153년]]이 돼 35세가 된 그는 가문의 수장인 타다모리가 사망하면서 후계 두령이 되었다. 타다모리가 숨질 때쯤 되면 이세 헤이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라 있었고, 키요모리도 '''북면의 무사'''직과 관직을 얻어 나갔다. 이런 출세나, 후에 가격에 따른 관직의 제한이 엄격한 시절에 비 공경 출신임에도 다죠다이진(태정대신)에 오르는 것에서 사실 황가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알려졌고, 그것이 출세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. 아직 젊은 키요모리의 하인들이 [[야사카 신사]]에서 난투극을 벌였음에도 [[토바 천황]]의 개입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정도. [[1156년]] 황가와 후지와라 셋칸케의 내분이 폭발하여 [[카와치 겐지]]와 [[헤이케]]가 모두 두 패로 갈라져 내전을 벌인 [[호겐의 난]](保元の亂)에서 카와치 겐지(河内源氏)인 [[미나모토노 요시토모]][* 미나모토노 요리토모, 요시츠네 형제의 아버지. 겐지의 두령이었다.]와 연합하여 승리해 [[고시라카와 덴노]]의 신뢰를 얻었으며, 이후에는 맹우였던 요시토모와 패권을 두고 싸우게 되었다. 요시토모와 키요모리가 교토에서 격돌한 [[헤이지의 난]](平治の乱)에서 [[니죠 덴노]] 편을 들어 겐지와 싸워 승리하였고, 도망치던 요시토모는 오와리 국의 우츠미에서 부하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다.[* 이 과정도 참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래서인지 키요모리는 그에게 후한 보상을 주지 않았다. 더 자세한건 [[미나모토노 요리토모]] 문서 참조.] 이후 무사로서는 최초로 '''다죠다이진([[태정대신]]太政大臣)에 임명되어''' 실권을 잡고 [[타이라]] 가문의 전성기를 열었다. 문제는 이때 겐지 일족을 처결하면서 요시토모는 죽였으나 그 아들들은 의모 이케노젠니(池禅尼)의 탄원에 의해 목숨을 뺏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는데 이것이 훗날 [[타이라]] 가문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. 이후 일족을 공경으로 들여보내고, [[후지와라]] 셋칸케의 씨장자를 사위로 맞았으며, 이후 셋칸케의 막대한 장원을 대신 관리하는 등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. 대외 교역에도 열성을 보여 새 수도인 [[후쿠하라#s-1|후쿠하라쿄]]를 중심으로 송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이문을 남겼다. 처제 타이라노 시게코를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실로 들여보내 그 사이에서 난 [[다카쿠라 덴노]]를 옹립한 후 사위로 삼아 외척 가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. 황가와 셋칸케의 외척으로서 그 세력은 하늘을 찔러 이 시대에는 '''"헤이케([[타이라]]씨)가 아닌 자는 사람도 아니다(平家にあらずんば人にあらず)"'''라고 할 정도로, 헤이케의 권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. 이 당시 헤이케는 공포정치를 편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, '''카무로(禿)'''라고 불리는, 머리를 일자로 깎은 소년들을 정보원으로 이용한 밀고의 장려 및 숙청을 자행했다고 전한다.[* [[NHK]] 사극 드라마의 묘사를 보면 붉은색의 깃털을 모아 붙인 붉은 옷을 입힌 단발머리의 소년들이 노란색 줄무늬가 들어간 검은 봉 혹은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. 고아를 모아서 만들었다는 대사도 나온다.] [[1177년]] 천황가의 외척이 되어 [[헤이케]]의 핏줄을 이어받은 황자를 낳는 등 너무도 강대해진 그의 세력에 대한 고시라카와 법황 측의 견제가 계속되었고,[* 측실 시게코 사후 양자 간 사이가 벌어졌다. 이제 양자를 중재하는 것은 [[타이라노 시게모리]]뿐이었으나 시게코에 미치지 못했고, 시게모리 사후 양자 간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.] 헤이케 제거의 음모가 드러나면서('''시시가타니 사건'''), 이에 격노한 키요모리는 인의 측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고,[* 특히 음모 장소를 제공한 승려인 슌칸은 아마미 제도 동쪽에 위치한 키카이지마 섬으로 유배보냈고 1179년에 슌칸이 죽을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.] 아들 [[타이라노 시게모리]]의 매형이던 후지와라노 나리치카까지 유배 후 아사시켜버렸다. 이후 불안하게 평온을 찾던 조정은 시게모리 사후 [[고시라카와 덴노|고시라카와인]]이 시게모리의 영지를 몰수하게 되면서 다시 요동치게 되었다. [[공가|공경]]들조차 탄식하던 이 사건에 분노한 키요모리는 군사를 이끌고 후쿠하라에서 상경하여 고시라카와 법황을 도바 이궁에 유폐해버리기에 이른다. 이후 [[다카쿠라 덴노]]를 퇴위시켜 인세이를 행하게 하고, 천황위에는 키요모리의 외손이었던 갓난아이 [[안토쿠 덴노]]를 즉위시키게 되니 그는 '''상황의 장인이며 동시에 [[천황]]의 외조부'''라는 일본 역사에 전무후무한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고 헤이케 천하는 영원할 듯했다. 그러나 [[고시라카와 천황|고시라카와 법황]]의 제2황자인 모치히토 왕이 겐지이지만 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케 편을 든 미나모토노 요리마사[* 전설에서는 요괴인 "누에"를 쏘아 죽였다고도 전해지는 궁술의 대가로, 관위가 산미(三位, 3품)였기 때문에 "겐잔미 요리마사"라고도 불린다. 아들 나카츠나가 무네모리에게 모욕당한 것에 격노하여 헤이케를 배반했다고 전해진다.]와 모의하여 각지의 겐지 생존자에게 헤이케 토벌 '''센지'''[* 일종의 교시나 어명 같은 것. 단, 인의 직접적인 어명인 "'인젠"'과 달리 이것은 적장자도 아니어서 '왕'으로 호칭되는 모치히토왕에게서 나온 것이라 격이 조금 떨어지는 명령이다. 그리고 이는 고시라카와 법황이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던 원인이기도 했다.]를 하달하며 거병하였다. 이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모치히토 왕의 피살을 계기로 결국 각지의 겐지 잔당과 그에 호응하는 호족들이 봉기하게 되었다. 이외에도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불교 사원의 발호와, 무리한 [[후쿠하라#s-1|후쿠하라쿄]]로의 천도와 실패[* 이는 앞서 언급한 불교 세력의 발호와 기근, 도적 떼의 창궐로 황폐한 왕성 [[교토]]를 떠나 정치를 일신하려는 시도였다.]로 헤이케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[[헤이케]]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. 여기에는 후쿠하라쿄 건설이나 잦은 황족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혼을 위로하고자 하던 법회의 비용 등을 무리하게 징수하면서 지방 무사들의 불만이 쌓였던 것이 배경이 되었다. 여기에 어디까지나 무사이던 [[타이라]] 가문은 한창 황가와의 결혼을 추진해 귀족 지위에 오르려 애를 쓰고는 있었으나 그 역사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후지와라 셋칸케나 황가와 같은 권위가 없었고, '같은 급'이었던 겐지 일족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되찾고자 앙앙불락하고 있었다. 동국에 유배되었다가 이즈의 호족 [[호조씨]]의 사위가 되었던 [[미나모토노 요리토모]] 등도 때를 같이 하여 세력을 규합하게 되는데, 키요모리는 이에 대한 진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열병으로 쓰러졌고, 결국 일어나지 못하며 6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. 그의 유언은 '뒷일은 무네모리에게 맡기며, 다른 의견은 있을 수 없다'는 것이었으며, <[[헤이케모노가타리]]>에서는 '장례나 불공을 말라. '''단지 요리토모의 목을 쳐 내 묘전에 가져오라.''' 이를 공양으로 여기라'[* やがて討手を遣わし、頼朝の首をば刎ねて、我が墓の前に懸くべし、それぞ孝養にてあらんずる]는 무시무시한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, 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[[센고쿠 시대|전국시대]]의 무사라면 있을 법한 얘기지만 헤이안 말기에는 보다 문화적이고 인간적인 풍토가 있었고, [[헤이케]] 역시 귀족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패배한 겐지의 잔당을 각지에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칠 정도였다.[* 이는 겐지와 연고가 있는 황족이나 귀족들의 탄원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. 일례로 [[미나모토노 요리토모]]의 어머니 유라 고젠은 아츠타 신궁(熱田神宮)의 오오구지(大宮司) 후지와라노 스에노리(藤原季範)의 딸로 내친왕의 시녀였기 때문에 나름의 기반과 연고가 있었다. 요리토모 역시 무네코(統子)를 섬긴 일이 있었다.] 따라서 이는 작가의 창작으로 여겨지나[* 이는 드라마 [[요시츠네]]에서도 유언을 집행한 토키코의 개인적인 원한을 키요모리의 유언으로 가장한 뉘앙스로 연출하였다.] 당시 조정의 [[공가]]였던 쿠조 카네자네의 일기 <교쿠요(玉葉)> 요와 원년 8월 1일 기사에, 요리토모의 거병 뒤에 조정에서 무네모리에게 요리토모와의 화해를 권유하자 "내 아들, 내 손자로써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 해도 그 시신은 요리토모 앞에서 보여야 할 것이다!"[* 我の子、孫は一人生き残る者といえども、骸を頼朝の前に晒すべし]라는 키요모리의 유언을 들며 거절했다고 실려 있어, 원래 했던 이야기가 후대에 각색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